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의 전통주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대한제국]] 말기 [[일본제국]]의 영향으로 대한제국 정부가 세수 확보를 위해 근대적 세법을 도입하며 주세법을 최초 도입한 직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조선총독부]]는 [[대만일치시기|대만 식민지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식민지에 대한 비용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세저항이 적은 간접세를 적극 도입했고, 이 과정에서 주세법이 강화되어 시행됐다.[* 이런 경향은 일본이나 한국만의 경향은 아니었는데, 미국도 독립 직후 세수 확보를 위해 연방 정부에서 위스키세 도입을 시도한 것을 비롯해 연방과 주 모두에서 면허제를 비롯한 근대적 주세법 체계를 도입하였고, 영국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포함한 연합왕국을 설립 이후 연합왕국 전역에서 면허제를 비롯한 주세법을 도입한 바 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면허가 없는 가내주들과 고율의 주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소형업체들의 술들은 불법 밀주 취급 받으며 탄압당했고, 이는 대규모 봉기와 밀주 제조를 야기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연방과 각 주의 이중 규제와 과세로 인한 까다로운 주류 제조 및 유통 규제와 높은 주류세로 2020년대까지도 갖가지 조세 및 규제 회피 시도와 밀주 제조가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 당시 도입된 주세법은 근대 산업적 규제 및 관리를 위한 면허제와 회사의 통합, 조선주(전통주)와 일본주의 구분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세법상 분리로 [[일본주]] 업체가 조선주보다 좀 더 유리하게 세법을 적용받아 조선에 일본 주조 업체들이 잘 정착 할 수 있었다. 또한 주정식 소주, 즉 [[희석식 소주]]에 대한 주세가 저렴했던 일본 본토 주세법의 영향으로 희석식 소주에 대한 세금이 저렴했고, 1920년대 말 마스나가 주조소가 처음으로 희석식 소주를 생산한 이후 희석식 소주를 제조하는 조선 업체들까지 등장하며 조선에 희석식 소주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일제는 1916년 강화된 주세령으로 제한면허제를 시행하여 각 가문에서 자가용으로 만드는 가양주에 대해서도 자가용 제조 [[면허]]를 받도록 했는데, 자가용 술에 대해서 시판하는 술 보다 높은 세율을 매겼다. 즉, 만들어 먹는 것보다 사 먹는게 더 싸게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관리 하에 있는 양조 업체들의 술을 사마시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가양주를 타인에게 판매할 수 없도록 하고, 면허자가 사망하면 상속인이 면허를 이어받을 수 없도록 했다. '''사실상 가양주 주조를 막으려는 정책'''이었다. || [[파일:밀주단속.jpg|width=100%]] || || 일제의 [[밀주]]단속으로 인해 생겨난 짚동가리술 || 면허제 시행 초기, 자가용 면허를 받은 사람은 30만명이 넘었으나 이러한 가양주 탄압 정책으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면허자는 급감하였고 1932년에는 오직 1명만이 남았으며 마지막 면허권자의 사망 이후인 1934년에는 단 한명도 면허자가 남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전통주들과 가양주들이 [[밀주]]가 되어 지하로 숨거나 대가 끊겨 사라졌다. 다만 자본 투자를 유치하고 근대적 생산 체계를 갖추어 총독부 직권으로 '주류 제조 및 유통 면허'를 받은 전통주 업체들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증류식 소주|소주]]는 [[개성시|개성]] 이북 지방에서, [[탁주]]는 개성 이남 지방에서 주로 소비되었는데, 북한 지방에서는 1927년 주정식 소주에 맞서 [[진로(브랜드)|진천양조상회]] 등에서 기존 고가의 증류식 소주를 대체하는 흑국 소주를 생산하며 어느 정도 경쟁 체제를 갖췄다. 남한 지방에서도 군산이 개항, 일제의 쌀 수탈 창구가 되면서 여기에 쌀이 몰리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군산의 [[백화수복|조선주조]]에서 생산하는 일본식 청주를 필두로 탁주, 흑국/백국 소주가 생산되어 조선 내수 시장에 공급된 것은 물론 일본제국 내 다른 지역들로도 수출되었다. 청주와 증류식 소주는 이 때부터 시장에서 지위를 잃고 지역 유지 계층, 명문가의 고급 가양주로서만 유지되기 시작했다.[* 양가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일반 서민 계층이 소모하던 저가형 한국식 주류는 품질 경쟁에서 일본식 청주와 흑국/백국 소주에 밀려 빠르게 도태되었으나, 반면 지역 유지/명문가 계층이 즐기던 고급 가양주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식민지 지배계급으로 넘어온 일부 일본인들이 이런 유지/명문가들의 가양주를 예찬한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고품질의 쌀로 유명하고 일본인들의 접근성이 우수하며 원래부터 지역 유지/명문가들이 많았던 중부 간척지(평택 등)나 평야지역(여주, 이천 등)일수록 이런 기록이나 구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 뒤 1929년의 미국발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충격에 이어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제국이 전시체제에 돌입하며 식량과 주류를 전략물자로 통제하기 시작하자 대만산 당밀의 공급에 차질이 생겨 흑국마저 도태되고, 많은 양의 쌀이 필요한 청주와 증류주 또한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조선 업체들이 생산하는 막걸리 등의 [[탁주]]만큼은 타 주류의 전시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 주류 시장 중 약 70% 점유율을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